3100 대 1 경쟁 뚫은 '말총 작가'…로에베·BTS가 반했다

입력 2022-07-14 16:16   수정 2022-07-22 18:46


조명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항아리가 보인다. 성글성글하게 짜인 바구니 같기도 하다. 구리로 만들었나 싶더니 마치 머리카락처럼 반투명한 끈들이 빛에 따라 호박처럼 반짝인다. 자세히 보니 말의 꼬리털 ‘말총’이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주말이면 서울공예박물관 전시장에 3000명이 줄을 선다. 공예 전시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그림 마니아’로 알려진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도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 인증샷을 올렸다.

이 전시장의 하이라이트를 만든 주인공은 제주 출신 정다혜 작가(33)다. 그는 사극 속 갓과 망건의 재료로 익숙한 말총 공예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로 승화시켰다. 지난해 ‘말총-빗살무늬’(2021)로 청주공예비엔날레 대상을 받아 주목받은 그는 올해 전작보다 더욱 섬세한 작품 ‘성실의 시간’(2021)으로 스페인 명품 브랜드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서 한국인 최초 대상을 받았다.

올해 공예상에는 116개국 3100여 명의 작가가 지원해 최다 응모 기록을 세웠다. 그중 30명을 최종 후보로 뽑았고, 정 작가가 대상을 받았다. 당시 로에베 재단 심사위원들은 정 작가의 작품을 놓고 “어디서도 보지 못한 형태와 재료의 결합이 절묘하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한국인 첫 번째 수상으로 국내 공예업계도 들썩였다. 로에베 재단 총괄 커미셔너 조혜영은 “전통 공예는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며 “정 작가의 말총 작품은 전통의 재해석이 효과적으로 된 시도”라고 말했다. 가장 한국적인 소재 말총으로 만든 공예작품으로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정 작가를 지난 7일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났다.
“나에게 ‘말총’은 마지막 동아줄”
1989년생 제주도 출신인 정다혜 작가는 염색 공방을 운영하는 부모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자연스럽게 제주대 미술학부 조소과에 진학했다. 전업작가를 꿈꿨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공연기획사에서 1년 반을 일하며 작가의 꿈을 접으려던 찰나,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찾아보라는 지인 추천으로 평생 살던 제주를 떠나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부모님처럼 염색공예를 하려 했지만 이미 그 분야에는 쟁쟁한 경쟁자가 많았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5년 전 국내 유일한 공예 기관인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지역 연계 프로그램에 지원해 그곳에서 운명처럼 ‘말총’을 만났다. 그는 “말총을 본 순간 마지막 동아줄을 잡은 것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장인들에게 전통 말총 기법을 이수받은 그의 첫 작품은 작은 모빌이었다. 말총은 국내에서 소재를 얻기 쉽지 않은데, 그가 제주 출신인 것은 다행이었다. 고향 주변 말 농장에서 말꼬리를 얻어 작업했다. 수급이 일정치 않아 때론 수입하기도 했다.

말총공예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재료가 워낙 비싼 데다 한 땀 한 땀 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말총 공예 특성상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상품화하기 쉽지 않은 일. 그러던 찰나 기회가 왔다. 지역 연계 프로그램 이수자들을 위해 마련된 전시에서 생애 처음으로 액세서리 등 작품 7개(개당 15만원)를 팔게 됐다. 정 작가는 “그 전시가 작품을 알리게 된 첫 계기였다”고 했다. 이때의 작은 성공으로 거짓말처럼 각종 전시회와 공예플랫폼을 통한 납품 의뢰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700년 역사의 말총공예…눈물로 만든 ‘성실의 시간’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지난해 청주공예비엔날레 대상을 받은 작품 ‘말총-빗살무늬’다. 대구박물관에 전시된 사람의 키만큼 커다란 빗살무늬 토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정 작가는 “큰 토기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작품에 담고 싶었다”며 “말총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말총을 입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리 강도와 밀도가 일정해야 한다. 자칫 만들어 놓고 보면 똑바로 서지 못하고 찌그러진 모양새가 되기 일쑤다. 그는 “재능이 많지 않아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사라져가던 말총 공예. 그렇게 서른두 살 젊은 작가의 성실한 시간과 끈기가 그해 공예비엔날레 대상으로 이어졌다.

생애 첫 수상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그를 일찌감치 눈여겨본 조혜영 커미셔너는 곧바로 로에베 재단 공예상 출품을 권유했다. 11월 결혼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출품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그는 말 그대로 눈물로 밤을 새우며 하루종일 말총을 엮었다. 모자란 시간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전작보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작품의 기본 틀은 조선시대 모자 종류인 네모난 방건·사방관(四方冠)의 짜임새를 접목시켰다.

“기록상 700년의 역사를 지닌 말총공예는 무늬가 많이 남아 있는 게 없어요. 조선 중후기 무늬들을 패턴화해 작품 속에 역사성을 담으려 했습니다.”

작품의 이름이 ‘성실의 시간’인 것은 그의 노력과 작품 속에 담긴 전통공예의 역사를 뜻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로에베의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제주 작은 공방에서 일하며 생계를 고민하던 젊은 작가는 이제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로에베 재단은 우승자에게 상금 5만유로(약 6500만원)와 로에베 브랜드와 협업할 기회를 준다.

1년 새 두 개의 큰 상을 받은 그는 아직도 얼떨떨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수상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우연처럼 만나게 된 말총이 자신을 운명처럼 좋은 길로 이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롤모델로 피카소를 꼽았다. “피카소처럼 죽을 때까지 작품활동을 할 거예요.” 그의 ‘성실의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방준식 기자 silv000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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